강서의 역사

강서의 유래

역사상 최초지명은 “제차파의현”으로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등장한다. 이는 백제가 이땅을 지배할 당시 해마다 허가바위 동굴 속에서 수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장소라는 뜻이다.

이후 재차파의로 불리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율진군 공암현, 고려시대에는 양광도 공암현으로 지명이 변경되었고 조선조 이후에는 금양현, 금천현, 양천군, 양천현 등으로 지명변화가 있었다.
1914년에 전국 행정개혁에 따라 김포군으로 병합되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 1977년 영등포구에서 분리되어 다시 강서구로 탄생되었다.

이후 1988년 15개 행정동을 양천구로 분리시키고 이후 일부 동 편입 및 분리 분동을 거쳐 현재는 22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서의 동 유래

  • 1염창동
    염창동은 조선시대에 서해안의 염전으로부터 채취해 온 소금을 서울로 운바하는 소금배의 뱃길 어귀인 이곳에 소금보관창고 (염창동 103번지 근방)를 지었기 때문에 염창동이라는 동명이 유래되었다. 염창에는 서해안과 남해안의 염전에서 만든 소금을 뱃길을 이용해서 한강 하구까지 들여오는데 일단 한강하구에 진입한 때는 마포근방까지도 가게되지만 소금의 경우는 자칫하면 물에 녹는 경우가 많았고 이곳이 소금을 보관하기에 좋은 장소였으므로 이곳에 소금을 내려놓고 다른 물품들은 마포까지 배로 운반되었다.
  • 1등촌동
    등촌동은 이 마을 지형이 산등성이로 구성된, 즉 등마루로 이루어졌다고하여 생긴 지명이다. 옛날 등촌동 주민은 산마루에 자리잡아 비교적 나무가 많고 초생지 또한 많아 나무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들이 많았는데, 이렇듯 서울 근교의 평화롭던 농촌마을에 틈이 없을 정도로 주택이 들어선 오늘의 모습을 이루기 시작한 때는 1975년이후로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오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서울시에서 인구증가에 따라 한강 남쪽 주택개발사업을 추진한데서 비롯되었다.
  • 1화곡동
    화곡동은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마치 황금물결의 계곡처럼 물결치는 풍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능동, 반곡리, 역촌리, 화곡리라는 4개 마을이 모여 화곡동이 되었다. 능동은 속칭 능꿀이라 불리는 현 화곡4동 신정여상 근방의 봉제산 기슭에 몇가구가 살던 마을이며, 반곡리는 원촌말,김촌말,박장말이 있었던 강서성모병원 근방의 현 화곡3동과 5동에 걸쳐 형성된 원씨,김씨,박씨,장씨 등이 살던 부락을 말하며, 역촌리는 강서구청앞 우장산 기슭에 있었던 역말자리로 추씨집안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 1가양동
    가양동의 동이름은 가마동과 고양리가 합쳐지면서 '가(加)'자와 고양리의 '양(陽)'자를 따서 동이름이 비롯되었다. 즉 가마동은 고양리와 함께 가양동의 동명이 유래된 곳인데 가마동의 유래는 지금의 (주)세원공장 언저리에 옛날 삼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양동은 조선시대에는 우리고장의 중심지역에 해당하였다.
  • 1발산동
    발산동에 있는 수명산의 모습이 마치 밥주발을 엎어놓은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발산이라고 불렸다. 이발산 (수명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외발산동이라 하고 동쪽은 내발산동이라고 한다. 내발산동은 우장산의 산록에 발달한 마을로서 원당리와 내발산리 2개의 마을이 합쳐서 형성된 동이다.
  • 1공항동
    공항동의 원래 지명은 소나무가 울창한 동네라해서 붙여진 송정리(松亭里)였다. 조선시대까지는 경기도 양천구누 가곡면,납어리,송정리,소율리였으니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제111호로, 납어리,송정리,소율리를 한데 묶어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가 되었다. 그 후 김포공항이 들어서면서 공항동으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 1방화동
    방화동은 산의 형국이 꽃피는 모양을 하고 있는 개화산 옆에 발달한 마을이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방화1동은 북쪽에 한강이 있고 연안에 농경지가 발달하였으며 한강건너로 행주산성과 마주보는 행주나루가 있던 동네이다. 현재의 방화동은 대한제국까지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 정곡리,치현리,능리로 각각 불리우던 부락이었다.
  • 1개화동
    꽃이 활짝핀 모양이라는 개화산 아래에 발달한 마을로써, 이곳 면적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높이 132m의 개화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개화동은 대한제국시기까지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 내부석리, 상사동, 개화리, 외부석리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 1마곡동
    마곡동은 옛날 이 일대에 삼을 많이 심었던 동네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곡동은 조선 초기까지 양천현이었따가 인조때 양천군으로 양천군 군내면의 후포리와 마곡리를 합하여 마곡동이라 했다. 마곡동의 현재 행정동은 가양1동이다.
  • 1과해동
    과해동은 강서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서울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형국이 오이줄기가 바다쪽으로 뻗은 모양이라 해서 과해(瓜海)라 하가가 음이 같은 과해(果海)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 1오곡동
    다섯골짜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1오쇠동
    옛날 이곳에 쇠노를 만들던 다섯사람이 도망와서 살게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